검찰이 미네르바가 전문대졸의 30대 무직이라고 발표하자 <중앙일보>는 1월 9일자 1면의 헤드라인을 "실체 드러난 '경제 대통령' 가짜에 놀아난 대한민국"으로 썼다. 전문대졸 학력에 무직이어서 가짜라고 말한 셈이다. 전문대졸은 경제대통령이 될 수 없나? 고졸도 대통령이 되고 전과 경력이 있어도 대통령이 되는 세상인데.
미네르바가 경제대통령으로 불린 건 그의 학력이 아니었다. 한국경제에 대한 그의 빼어난 분석때문이었다.
<중앙일보>의 또 다른 기사 '정체 드러난 미네르바'에는 "돌팔이 의사에게 당한 꼴"이라는 수사팀 관계자의 말도 인용했다. 최고의 학력과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현 경제팀이 지난 3월에 환율 인상을 용인하는 정책이야말로 돌팔이 정책이 아니었던가.
미네르바를 문제삼으려면 미네르바가 쓴 글을 문제삼아야 한다. 거친 문체나 경력을 혼동하도록 암시한 내용, 예측의 오류 등. 그러나 <중앙일보>의 헤드라인이 보여주듯이 이 사회는 학력과 경력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가짜와 돌팔이로 몬다. "다들 믿다가 잡아보니 별 이상한 사람이고 다 속았다"는 조영남의 미네르바 비하 발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간판이 우선하는 간판만이 대접받는 간판사회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가치를 인정받은 캘리포니아 와인
내용보다 간판 중심의 사회에선 지난 해 개봉한 영화
와인미라클은 와인세계의 판도를 바꾼 1976년 '파리의 심판'을 다룬 영화다. '파리의 심판'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와인은 의심의 여지 없이 프랑스 와인이었다. 1976년 프랑스 파리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와인 전문가들이 모여 와인 평가회를 열었다.
11명 중 9명이 프랑스인이었는데 평가 결과를 합산한 결과 놀랍게도 당시로는 무명인 캘리포니아 산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했던 프랑스의 샤토 무통 무쉴드와 샤토 몽로즈가 2, 3위로 밀리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 '파리의 심판'을 통해 무명의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의 콧대를 꺾고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물론 캘리포니아 와인의 뛰어난 품질이었지만 동시에 심사가 와인의 라벨을 완전히 가리고 오로지 잔에 담긴 내용물로만 평가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명성과 전통을 블라인드로 가리고 오로지 맛으로만 평가했기 때문이다.
(참조자료 : MB도 취임만찬 때 마셨다오-<씨네21>)
미네르바가 경제대통령으로도 불릴 건 지난 해 9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과 환율 변동을 제대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강만수와 미네르바가 한국경제의 방향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면 어떠했을까? 물론 1976년 '파리의 심판'처럼 모든 계급장을 떼고 경제에 대한 분석 내용만을 가지고 심사한다면 말이다.
경제부총리는 경제에 대한 식견외에도 조직 통솔력 등이 필요하니까, 당시 리만브러더스의 인수를 통한 금융선진화를 주장했던 <조선일보> 필자와 붙었으면 어땠을까. 과연 전문가들은 누구의 분석에 손을 들어주었을까?
1976년 '파리의 심판' 당시 의외의 결과에 놀란 한 심사위원이 심사표를 고치게 도로 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모든 전문가가 요구하지는 않았을까!
계급장 떼고 분석 내용을 비교해보자
미네르바의 출현은 개인이 창의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다중 지성의 시대임을 알려주는 증표이다. 또한 한국의 우수한 인터넷 인프라는 21세기 지식 시대에 유리한 기반임도 알려준다. 지식경제부를 출범시킨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지식 네트워크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찾아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물론 보수적인 한국사회도 거꾸로 가고 있다. <중앙일보>는 "학력이 초라한 무직의 30세 남성이 오프라인에서 금융론을 설파했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박씨는 익명성 뒤에 숨어서 교묘히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는 데 성공했다"는 발언을 다른 기사에 인용해 놓았다.
미네르바는 인터넷의 익명성에 힘입어 자신을 위장하는데만 성공한 것이다. 초라한 학력이 썼던 내용이 주는 놀라움이 아니라 초라한 학력의 실체에만 관심을 갖는다. 와인의 맛이 아니라 와인의 라벨만 따지는 것이다.
두 병의 와인이 있다. 한 병은 맛이 신의 물방울을 연상시킬 정도로 감미로운데 전통이라곤 찾을 수 없는 무명 라벨이 붙어 있다. 다른 한 병은 라벨은 명품인데 정작 맛은 물이 섞였는지 맹탕이다. 와인이라는 관점에서 무엇을 가짜라고 하겠는가?
한국사회는 전자만 가짜라고 한다. 그리고 후자는 명품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사회이기도 하다. 전혀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전자가 와인이라고 주장할라 치면 가짜로 몰아붙여 배제시킨다. 왜냐하면 라벨은, 간판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중앙일보>의 헤드라인은 옳다. '간판만 진짜'인 가짜에 놀아나는 한국사회로 고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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